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8세 (문단 편집) ==== <수장령> ==== 헨리 8세의 <수장령>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는 [[잉글랜드]]의 왕과 법률 기관이 '''교회의 자산 운용을 감찰할 권리와 성직자에 대한 형사 재판 권한이 있음'''을 선언한 것 뿐이었다.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는 로마의 [[주교]]일 뿐, 관할권을 벗어난 초법적이며 불법적인 통치를 종식시킨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 잉글랜드 교회(Church of England)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에 불과했으며, 이 교회의 방향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신학적, 전례적, 교리적 논쟁은 계속해서 벌어지게 된다. 자세한 것은 [[성공회]] 문서 참고. 헨리 8세는 자기 형 [[아서 튜더]]의 약혼자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 아서가 결혼한지 20주만에 병에 걸려 죽었지만 계속 [[잉글랜드]]에 남아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구두쇠였던 시아버지 헨리 7세가 캐서린의 [[지참금]] 200,000 두카토를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실에 반환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차남 헨리가 형 아서의 약혼자 캐서린과 결혼하는 것은 당시 윤리상으로도 문제가 있었는데, 교회법상으론 [[근친혼]]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럽 왕실들은 촌수로는 거의 죄다 근친혼이었지만 [[교황청]]에선 거의 예외없이 '''기독교 군주끼리의 결합을 대의로 인정했기에''' 이번에도 [[교황]]의 관면이 뒤따랐다. 헨리 8세는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교황 [[율리오 2세]]의 관면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은 줄줄히 요절이나 사산이 되었고, 딸인 [[메리 1세|메리 공주]]만 살아남고 캐서린이 더 이상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가 되자 큰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메리 공주를 당시 풍속대로 외국 왕가에게 시집보내면 하나 남은 계승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셈이었고,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헨리 8세가 죽을 경우, [[헨리 7세]] 치세 이전 [[장미전쟁|근 30여 년간 벌어졌던 왕위 계승 다툼]] [[병림픽]]이 재현될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단순히 아들을 보고 싶은 것 뿐이었다면 [[정부#s-3]]를 두면 될 일이고, 실제로 1519년 정부(첩) 엘리자베스 블런트에게서 헨리 피츠로이라는 남자 사생아를 얻어 [[공작(작위)|공작]] 작위 2개와 [[백작]] 작위 1개를 퍼주었지만, 사생아는 사생아일 뿐 왕위 계승자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고, 헨리 피츠로이도 요절했다. 중세 시절, 자식이 없어서 왕조가 끊기거나 아들없이 딸만 있어서 가문의 영지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일이 없던건 아니다. 그러나 여계 계승은 남자 계승자가 없을 경우 예외적으로 두는 수단이었고, 그나마도 자연스럽게 넘어가는건 보기 힘들었다. 일단 대륙의 [[프랑크 왕국]] 계통의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 왕국]]은 <[[살리카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남계가 절손되면 상위 군주에게 영지가 몰수되거나 아주 먼 친척에게 새로 분봉되었다. 프랑크 왕국 계통이 아닌 유럽 국가에서도, 딸에게 무사히 물려주는 경우보다 후계자가 어리거나 여성인 경우 무력으로 찬탈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와 아라곤과 같은 [[동군연합]]을 예로 들자면, 아라곤 왕국의 [[페란도 2세|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의 공동 통치자로 명목상 인정받긴 했지만 어떠한 권력도 누리지 못했다. 여기에 페르난도가 [[이사벨 1세]] 사후에 재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요절하여 외손자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에게 계승권이 넘어간 것일뿐 당시 풍속에선 여성 승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만 봐도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와의 결혼을 통해 [[러요시 2세]] 전사 후 정당한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이 경우에도 동부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헝가리 귀족들이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던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간섭으로 인해 서부 일부만 가져올 수 있었고, 보헤미아 왕국에는 여러 이권과 자치권을 퍼줘야 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치한 발루아-부르고뉴 공작가만 보더라도 [[부르고뉴 전쟁]] 중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처참하게 전사하고,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만 남은 상태에서 여계 승계를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근거로 프랑스 왕이 상위 군주의 권한으로 영지 몰수를 시도하자 당시 부르고뉴 궁정에서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SOS를 쳐서 무력으로 저지한 것이지, 결혼으로 온전히 왕국이 상속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절반은 프랑스 발루아 왕조에 뜯겼고, 손자대인 카를 5세 시절까지도 전쟁 상태였다가 결국 카를 5세가 프랑수아 1세에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북이탈리아 지배권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몰수된 영토를 포기했다.] 더군다나 '''잉글랜드는 역사상 [[헨리 1세]](노르만 왕조 제3대 왕)가 자신의 외동딸인 [[마틸다(잉글랜드)]]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음에도 여계 승계에 부정적인 신하들 덕에 쫓겨났고, 그 이후로도 당시 기준으로는 [[여왕]]이 없었다.[* 다만, 마틸다가 폐위된 이유에는 그것보다는 세금 문제가 한몫하긴 했다. 그리고 프랑크족이 특수한 경우인 것이지, 다른 게르만족계들은 여왕이 종종 나오긴 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계승할만한 여성 후계자가 없었고.]''' 게다가 헨리 8세 치세 때, 이전 [[장미전쟁|30여년간 왕위 계승을 두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휘하의 신하들도 하나 남은 왕위 계승권이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에 극도로 염려하고 있었으며, [[메리 1세|여자 군주의 통치는 남편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놓인다고]][* 사실 [[메리 1세]]의 경우에도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제2대 왕 [[펠리페 2세]]와 결혼했을 당시, 펠리페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돈 카를로스]]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물려받고, 메리와의 결혼에서 적자가 태어날 경우, 그 아이가 저지대와 잉글랜드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 스페인 대제국으로 통합될 예정은 전혀 아니었다.] 생각했기 때문에 신하들은 헨리 8세의 새 장가를 찬성했다. 물론 보통은 혼인무효를 교회에서 승인받으면 기존 자식들에게는 계승권을 인정하고 기존 왕비에게는 막대한 재산을 하사해서 좋게 내보내거나, 쫓아낸 경우라도 [[수녀원]]으로 유폐하고 끝냈는데, 헨리 8세처럼 무일푼으로 쫓아내거나 목을 쳐버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잉글랜드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이미 국왕의 나라가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로서의 국가 정체성이 뚜렷해진 상황이라 외국인 왕이 들어앉아서 잉글랜드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인 스페인 왕실[* 다만 캐서린의 친정은 트라스타마라 왕조로, [[압스부르고 왕조]] 이전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실이었다.]과 메리 공주의 지지 기반은 종교적으로 [[가톨릭]] 세력과 외세인 [[합스부르크 제국]] 및 [[스페인 제국|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메리에게 왕위가 넘어갈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과 결혼할 확률이 높았으며(실제로 그러했고) 그렇게 된다면 잉글랜드는 국익과 무관하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외정책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게 되는 형편이 되기에 잉글랜드 내부에서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중세 군주들이 이혼을 원할 때처럼 [[교황청]]에 혼인무효[* [[가톨릭]]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혼]](divorce)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몇 가지 경우 '혼인무효'(annulment)라는 것은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청에선 헨리 8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명분으론 "전임 교황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친정 조카가 [[스페인 국왕]]이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이 시기는 '''[[사코 디 로마]]'''(로마 대약탈), 즉 황제군에 의해 로마가 잿더미가 되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막대한 타격을 입으며 쇠락한 상태여서, 로마 교황이 도저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는 소송전으로 발전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이 전 남편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와의 결혼은 무효다!" 라고 주장했고, 캐서린은 >"나는 아서와 부부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 결혼은 정당한 사유로 무효가 되었으며, 따라서 헨리와의 결혼 역시 적법하다." 라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의 <[[레위기]]>가 어쨌니 저쨌니 하는 지리한 재판 끝에, [[교황청]]에선 결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들어 재판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로마에 와서 시비를 가리라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이는 합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해졌다는 걸 뜻했다. 1529년 8월, 혼인무효가 무산된 책임을 물어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궁정에서 쫓아내 요크로 돌려보내고[* 울지는 원래 [[요크교구|요크 대주교]]였다. [[추기경]]임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가 왜 못 되었냐면, 울지 이전에 취임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80세 넘게 장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엔 주교들이 임지에서 벗어나 여러 [[교구]]를 소유하며 빨대만 꽂고 다른 곳에서 수입만 차지하는 경우가 잦았다.] [[토머스 모어]]가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혼인무효에 이론적 근거[* 단순 어거지가 아니라 이미 교회법상으로 명백하게 [[근친상간]]이었다. 때문에 결혼 당시에도 이런 의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또 개혁 성향의 [[개신교]] 신학자들은 당연히 [[교황]]의 권위를 인정치 않은데다가, 개신교 신학에선 "결혼은 교회에서 주관하는 성사와 상관없다"는 게 통설이었기 때문에, 주저없이 주장한 것이다. (반면 [[가톨릭]]에서 결혼([[혼인성사]])은 [[7성사]] 중 하나로 매우 중요시된다.)]를 제공한 종교개혁 성향의 신하들을 총애하기 시작했는데 마침 [[캔터베리 대주교]]가 사망하자 대륙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교황청]]과의 단절을 주장한 [[토머스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청은 헨리 8세가 막 나갈 걸 방지하려고 했는지, 예상 외로 크랜머에게 임명장까지 보내주었다.] 최후의 시도로 교황청에 [[영국]] 대사를 보내봤지만, 이미 [[클레멘스 7세]]는 [[사코 디 로마|카를 5세에게 사로잡혀 산탄젤로 성에 감금되어 있는 처지]]라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시도까지 빗나가자, 1534년 11월. 헨리 8세는 이미 잉글랜드 교회에서 싹튼 [[종교개혁]] 성향 성직자 귀족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을 선포했다.[* 현재 <수장'령'>은 실제론 의회에서도 통과되어 령이 아니라 법인데 잘못 번역된 것으로, <수장법>으로 바꿔 불러야 하지만, 워낙 <수장령>으로 자주 쓰였기에 보통 <수장령>으로 쓴다.] 그리고 나서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후속조치로 <수장령>에 이어 '''<반역법>'''(Treason Act)을 제정하여, 잉글랜드 통치자에게서 나온 처분을 외국에 상소하는 것을 반역으로 선언했다. 더불어 이런 권한을 부인하는 것까지 반역으로 선언했다. 잉글랜드 교회 내부의 전통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은 일단 <수장령>에 몇몇 조건을 거는 정도로 반항시도를 하다가, 헨리 8세의 뜻이 워낙 강경했기에 <수장령>을 받아들였다. 이 당시까지도 독실한 가톨릭 성향 교도들은 "왕이 [[교황]]과 싸우다 그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이 강했다. 중세 [[유럽]] 군주들도 일시적으로 난리치다가 교황청과 화해하던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었다.(종교개혁 성향의 [[젠트리]] 계층은 헨리 8세의 조치를 완전히 환영했다.) 그러나 <수장령>을 죽어라고 거부한 신하들이 둘이나 있었다. 헨리 8세의 심복이자 대법관으로 대륙 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교도 성향의 신하들을 탄압하는데 등용했던 [[토머스 모어]][* 헨리 8세는 절친 [[토마스 모어]]를 시켜서 대륙 신학에 영향받은 [[옥스퍼드 대학]], [[케임브리지 대학교]] 신학교수 40명을 체포하고 6명을 화형시켰다. 그런데 헨리 8세가 이혼을 밀어부치자 모어는 이에 반대하며 1532년 5월, 대법관에서 사임했다.]와 존 피셔 주교[* [[교황청]]에서는 피셔 주교가 헨리 8세에 의해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 [[추기경]]을 처형하랴 싶어서 옥중에서 추기경으로 임명했으나 헨리 8세는 개의치않고 피셔를 처형했다.]를 1535년에 처형하고 수도원을 파괴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1538년 12월에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렸다.'''[* 관점을 완전히 돌린다면, 1,000년 이상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를 한 순간에 반(反) 가톨릭 국가로 만든 국왕의 명령에 대해 단 2명(그것도 성직자는 오직 피셔 추기경 하나)만이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는 것은 또 다른 면을 시사한다. 그만큼 잉글랜드 내에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는 것이다. <튜더스>같은 작품에서 <수장령>을 반대하는 신하가 둘 밖에 안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인물 둘만 넣은 게 아니라, '''정말로 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신앙의 수호자'''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인 [[교황]]님에게 개기지 말라고 말해서 [[교황청]]으로부터 칭찬(?)까지 받은 헨리 8세가 왜 이리 갑자기 변하며 여자 하나에 빠져 [[교황]]에 뒷통수를 쳤나라는 의문점이 들 수 있다. '''당연히 [[앤 불린]]보다 아들 낳기 염원이 큰 것이었고, 원래 헨리 8세 이전의 역대 [[잉글랜드 국왕]]과 로마 교황와의 사이는 그다지 사이가 원만한 편이 아니었다.''' 앙주(플랜태저넷) 왕조 시절인 [[존 왕]] 치세때도 [[수도원]]과 교회를 털고, 성직자들의 수입을 가로챘다가 파문당하기도 했고, 그 아버지인 [[헨리 2세]] 시기에는 토마스 베켓을 죽이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막후 타협을 통해 대부분의 실리, 특히 성직자 처분권을 잉글랜드 왕이 가져갔으며, [[에드워드 1세]] 시절에도 교회와 수도원 재산을 놓고 교황과 한바탕 싸웠다. 아비뇽 교황 시절에는 교황들을 [[프랑스]] 카페 왕실의 앞잡이로 생각하여 무시했으며, [[백년전쟁]] 시기에는 실제로 아비뇽으로 대포를 끌고 가서 교황청을 협박해 돈을 뜯기도 했다. 또한 아비뇽-로마 교회의 대분열기에도 역시 [[대립교황]]들 사이에서 간을 보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헨리 8세 또한 [[교황청]]에 그다지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었다. 헨리 8세는 즉위 초부터 잉글랜드 교회를 스스로 통제하고 싶어했고, 재상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영국 내에서의 '교황청의 사절'로 인정해달라고 계속 주장했으나 번번히 거부당했다. 교황청에서 보기엔 울지를 교황청 사절로 인정하면 사실상 잉글랜드 내에서 교황의 대리인이 되는 것인데, 울지는 헨리 8세의 충실한 신하이니 헨리 8세가 울지를 핑계삼아 잉글랜드 교회를 마음대로 다룰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1516년 라이벌인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교황군을 격파하고 볼로냐 화약을 통해 프랑스 교회에서의 실질적인 권한을 취득하자 고까운 탓도 있었다. 교황청에서 세세한 명분들을 얻은 대신 프랑스 내 9개 대주교 자리를 포함하여, [[주교]], [[아빠스|수도원장ㆍ수녀원장]] 등 600여개 성직 임명권과 교회 수입을 [[프랑스 국왕]]에게 양도하는, 사실상 교황청의 완전한 항복에 가까운 조치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결과인 잉글랜드 국교회(세계성공회의 모태)의 역사는 해당항목 [[성공회]]의 잉글랜드 교회의 역사 참조 바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